넷플릭스가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이만한 각본은 못 만든다. 한 지붕 아래서 일하던 동료들이 갈라서서 각자 회사를 차리고, 10년 만에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두 기업이 되어 서로의 신모델 발표 일정을 노려보는 이야기. 오늘은 OpenAI와 Anthropic, 이 두 회사의 연대기를 시즌제 드라마처럼 정리해 본다.
관전 포인트
이 드라마의 재미는 두 주인공이 원래 같은 회사 사람들이었다는 데 있다. Anthropic 창업 멤버들은 전원 OpenAI 출신. 그러니까 이건 경쟁사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상 분가한 형제의 이야기다.
시즌 1 (2015~2018) — “인류를 위한 AI”라는 창업 신화
2015년 12월, 샘 알트먼(Sam Altman)과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손을 잡고 비영리 연구소 OpenAI를 세운다. 슬로건은 거창했다. “AGI가 특정 기업의 소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 인류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 10억 달러 기부 서약과 함께, 구글 딥마인드의 독주를 견제할 ‘착한 대항마’로 등장한 것이다.

초반 전개는 잔잔하다. 2018년 GPT-1이 나왔지만 세상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 시즌의 하이라이트는 일론 머스크의 하차다. 2018년 머스크는 이사회를 떠나는데, 표면적 이유는 테슬라 AI와의 이해충돌이었지만 훗날 “내가 경영하겠다고 했는데 거절당했다”는 뒷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주연급 배우가 시즌 1에서 하차하는, 미드에서 흔히 보는 그 전개다.
시즌 2 (2019~2020) — 변심, 그리고 돈의 등장
2019년 2월, OpenAI가 GPT-2를 발표하면서 희대의 명대사를 남긴다.
“이 모델은 너무 위험해서 전체 공개할 수 없습니다.”
지금 보면 귀여운 수준의 모델이었지만, 이 발언은 “천재적인 마케팅이냐, 진심 어린 우려냐”를 두고 커뮤니티를 두 쪽으로 갈라놨다. 그리고 몇 달 뒤, 더 큰 반전이 온다. 비영리를 표방하던 OpenAI가 영리 자회사(capped-profit) 를 만들더니,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10억 달러 투자를 받은 것이다. “인류를 위한 AI”가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하는 AI”가 되는 순간이었다.
2020년 GPT-3가 나오면서 판이 달라진다. “이거 진짜 사람이 쓴 글 같은데?”라는 반응이 처음으로 대중 사이에서 나왔고, OpenAI는 이를 유료 API로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회사 내부에서는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안전 연구를 이끌던 다리오 아모데이(Dario Amodei)와 동료들이 회사의 상업화 속도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시즌 3 (2021~2022) — 분가, 그리고 ChatGPT라는 빅뱅
2021년, 드라마의 두 번째 주인공이 등장한다. 다리오 아모데이가 여동생 다니엘라(Daniela Amodei)를 비롯한 OpenAI 동료 여러 명과 함께 퇴사해 Anthropic을 설립한 것이다. 창업 이유가 인상적이다. “AI가 너무 강력해지기 전에, 안전하게 만드는 법부터 연구해야 한다.” OpenAI의 창업 정신을 OpenAI 밖에서 이어가겠다는, 일종의 정통성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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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ropic이 조용히 Constitutional AI(헌법적 AI) 같은 안전 연구를 쌓아가는 동안, OpenAI는 2022년 11월 30일 역사에 남을 한 방을 터뜨린다. ChatGPT. 출시 5일 만에 100만 명, 2개월 만에 월 사용자 1억 명.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소비자 서비스였다. 재미있는 건 ChatGPT가 원래 대단한 신제품이 아니라 기존 GPT-3.5에 채팅 UI를 씌운 ‘데모’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세상을 바꾼 건 모델이 아니라 채팅창 하나였던 셈이다.
비하인드
ChatGPT 쇼크 직후 구글은 내부에 ‘코드 레드’를 발령했다. 그리고 구글이 선택한 견제 카드 중 하나가 재미있게도 Anthropic에 대한 수억 달러 투자였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실리콘밸리식 처세술.
시즌 4 (2023) — 같은 날 출시라는 우연, 그리고 5일 천하
2023년 3월 14일. 이 날짜는 기억해 둘 만하다. OpenAI가 GPT-4를 발표한 바로 그날, Anthropic도 첫 모델 Claude를 공개했다. 물론 스포트라이트는 GPT-4가 다 가져갔다. 변호사 시험 상위 10%라는 성적표 앞에서 신생 회사의 첫 모델은 조용히 묻혔다. 하지만 이날부터 두 회사의 발표 일정이 서로를 의식하며 꼬이기 시작한다.
7월에는 Claude 2가 100K 토큰 컨텍스트라는 카드를 들고나왔다. “GPT-4보다 똑똑하진 않아도, 책 한 권을 통째로 읽을 수 있다”는 차별화 전략. 9월에는 아마존이 Anthropic에 최대 40억 달러 투자를 발표하며 판돈을 키웠다.
그리고 11월, 이 드라마 통틀어 최고의 에피소드가 방영된다. OpenAI 이사회가 샘 알트먼을 전격 해임한 것이다. 금요일에 해고, 주말 동안 직원 700여 명이 “알트먼 없으면 우리도 나간다”는 연판장에 서명,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럼 우리가 다 데려가겠다”고 선언, 그리고 화요일에 알트먼 복귀. 단 5일짜리 궁중 쿠데타였다. 더 기막힌 건, 이 혼란의 와중에 이사회가 Anthropic에 합병을 타진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는 점이다. 다리오 아모데이가 이를 일축하면서 성사되진 않았지만, 만약 성사됐다면 이 드라마는 시즌 4에서 종영했을 것이다.
시즌 5 (2024~2025) — 왕좌가 흔들리기 시작하다
2024년 3월, Anthropic이 Claude 3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처음으로 벤치마크에서 GPT-4를 꺾었다. 1년 넘게 유지되던 “그래도 최강은 GPT-4”라는 공식이 깨진 순간이다. OpenAI가 GPT-4o로 응수하자, Anthropic은 3개월 뒤 Claude 3.5 Sonnet으로 받아친다. 특히 코딩 능력에서 개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글은 GPT, 코딩은 Claude”라는 구도가 이때 굳어졌다.
OpenAI는 2024년 9월 추론 모델 o1으로 “생각하는 AI”라는 새 판을 열었고, Anthropic은 2025년 Claude Code를 앞세워 에이전틱 코딩 시장을 사실상 접수했다. 터미널에서 AI가 알아서 코드를 짜고 고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2025년 8월 OpenAI가 야심 차게 내놓은 GPT-5는 기대치가 하늘을 찔렀던 탓인지 “이게 그 GPT-5라고?”라는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고, 그 사이 Anthropic은 Sonnet 4.5, Opus 4.5를 착착 쌓아 올리며 기업 시장 점유율을 늘려갔다.
이쯤에서 돈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두 회사의 기업가치 추이를 보자.
| OpenAI | Anthropic | |
|---|---|---|
| 2023 | 29 | 4 |
| 2024 | 157 | 18 |
| 2025 | 500 | 183 |
2023년만 해도 7배 차이였던 격차가, 2025년에는 3배 이내로 좁혀졌다. 후발주자가 이 속도로 따라붙는 건 산업 역사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시즌 6 (2026) — GPT-5.6 vs Fable 5, 현재 진행형
그리고 올해. 2026년 상반기는 두 회사가 그야말로 2주 간격으로 주먹을 주고받은 시즌이었다.
- 4월 23일 — OpenAI, GPT-5.5 Thinking / Pro 공개. 5월 5일에는 GPT-5.5 Instant가 ChatGPT 기본 모델로 깔린다.
- 5월 28일 — Anthropic, Opus 4.8 발표. Claude Code에 대규모 문제를 알아서 쪼개 처리하는 ‘dynamic workflows’가 붙었다.
- 6월 9일 — Anthropic이 판을 흔든다. Claude Fable 5와 Claude Mythos 5 동시 발표. Opus 위에 새로운 ‘Mythos급’ 티어를 만들고, 안전장치를 붙인 Fable 5를 일반 공개, 안전장치를 뗀 Mythos 5는 승인된 사이버 방어 기관 등에만 제한 제공하는 이원화 전략이다. 가격은 입력 100만 토큰당 10달러, 출력 50달러로 Opus 4.8의 딱 2배.
- 6월 26일 — OpenAI의 반격. GPT-5.6을 Luna / Terra / Sol 세 가지 버전으로 공개. 다만 초기에는 정부 승인을 받은 20여 개 기업에만 제한 프리뷰로 제공됐다.
- 6월 30일 ~ 7월 1일 — Fable 5에 걸려 있던 수출 통제가 풀리면서 글로벌 사용자에게 개방.
2026년의 새 변수
시즌 6의 특징은 경쟁 구도에 정부와 규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GPT-5.6은 정부 승인 기업 대상 제한 출시로 시작했고, Fable 5는 수출 통제를 거쳐 공개됐다. 최전선 모델이 이제 반도체처럼 전략 자산 취급을 받는 시대다.
이제 신모델 발표는 성능 자랑 대회가 아니라 “얼마나 강력한 걸 만들었는데, 얼마나 조심스럽게 내놓느냐”의 게임이 됐다. 두 회사가 10년 전 각자 다른 방식으로 던졌던 질문 — “강력한 AI를 어떻게 안전하게 세상에 내놓을 것인가” — 이 이제야 진짜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그런데 구글은 정말 뒤처진 걸까?
이 드라마만 보면 구글을 비롯한 나머지 회사들이 들러리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이 두 회사의 서사가 워낙 극적이라 생기는 착시에 가깝다. 구글은 애초에 트랜스포머 논문(“Attention Is All You Need”)을 쓴 회사고, Gemini와 자체 칩(TPU), 검색·안드로이드라는 유통망까지 가진 유일한 풀스택 플레이어다. 조용히 벤치마크 상위권을 오가고 있기도 하다. 다만 구글의 이야기에는 해고당한 CEO도, 분가한 형제도, 5일 천하도 없을 뿐이다. 드라마가 재미없다고 실력이 없는 건 아니다.
정리하며
10년을 요약하면 이렇다. “인류를 위한 AI”를 외치며 태어난 비영리 연구소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타트업이 됐고, 그 회사의 안전팀이 뛰쳐나와 만든 회사가 가장 강력한 추격자가 됐다. 그리고 2026년 여름, 두 회사는 GPT-5.6과 Fable 5라는 카드를 서로의 얼굴 앞에 들이밀고 있다.
시즌 7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하나다. 이 드라마, 아직 종영할 기미가 전혀 없다.
깨알 같은 사실
이 포스트의 초안을 잡는 데 사용된 모델이 바로 Claude Fable 5다. 드라마 등장인물에게 드라마 줄거리 요약을 시킨 셈인데, 본인 등판 시즌을 유난히 공들여 쓰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 자료
- Introducing Claude Fable 5 and Claude Mythos 5 — Anthropic
- Anthropic releases Mythos-like AI model to the public, Claude Fable 5 — CNBC
- OpenAI releases powerful new GPT-5.6 model under restrictions — Axios
- Introducing GPT-5.5 — OpenAI
- OpenAI releases GPT-5.5 Instant, a new default model for ChatGPT — TechCrunch
- Anthropic releases Opus 4.8 with new ‘dynamic workflow’ tool — TechCrunch